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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7. 10. 14:04

박제가편 - 책만 보는 바보 책 속 여행2010. 7. 10. 14:04


"저는 제 후손들에게 이처럼 서러운 핏줄을 이어 가게 할 최초의 조상이 될 테지요.
제가 세상을 떠난다 하더라도 그들의 원망과 눈물과 한숨이 제 몸 위에, 제 이름 위에 덕지덕지 쌓여 짓누를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하면 등골이 다 서늘해진답니다.
차라리 바람처럼 구름처럼, 이 세상에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혼자 훨훨 떠돌아다니고 싶습니다."

꿈틀거리는 짙은 눈썹 아래 옅은 녹색 눈동자는 꿈을 꾸는 듯 아련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다.
파르르 떨리는 벗의 입 꼬리를 보며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날카로운 사금파리 하나가 내 마음을 긋고 간 듯, 그저 오래도록 가슴이 아팠을 뿐이다.






"운명이란 게 어디 별것인가요? 저는 나를 마음대로 하려 드는데, 나라고 저를 마음대로 못하겠습니까?
단단히 얽어매어 놓은 사슬 한 겹이라도 내 반드시 풀고 말 것입니다."

나는 깜짝 놀랐다.
보이지 않는 운명이 내 앞길을 가로막고, 주눅들게 한 적이 수도 없이 많았다.
그때마다 내가 느낀 것은 두려움과 무기력감이었다.
적자와 서자의 구별이 엄격하여 우리 같은 사람은 낄 자리가 없고,
농사를 짓거나 장사를 하여 먹고살 방도를 찾아보려 하여도 양반의 핏줄이라 하여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럴 때 한스러운 것은 어머니가 물려준 보잘 것 없는 핏줄이 아니라,
아버지가 물려준 이기적인 양반의 핏줄이었다.

우리를 쥐고 흔드는 운명의 손길은 사람 사는 세상 어디에고 우리가 낄 자리를 만들어 주지 않았다.
우리는 저마다 채워지지 않은 헛헛함으로 늘 마음이 떠돌고 했다.
하지만 그뿐, 한 번도 내가 그 운명에 맞서 싸울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져 보지는 못했다.
그런데 나라고 제깟 운명을 마음대로 하지 못하겠느냐라니,
과연 박제가다운 말이었다.



박제가의 저러한 자신감과 배짱은 공통의 운명을 짊어진 채 서로를 이해하고 위로하는 벗들이 있어 나올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를 죄고 있는 운명을 완전히 벗어 던질 수 없다고 해도 좋다.
다함께 손잡고 운명이라는 것을 바라볼 수 있다는 그 든든함이면 충분하였다.
서로의 손길이 닿아 있노라면 우리를 꽁꽁 동여맨 사슬 한 겹이라도 풀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 느슨해진 가슴 속에 서늘한 바람 한 줄기 쯤은 들어올 수 있지 않을까.
박제가는 우리에게 그렇듯 서늘한 바람 같은 벗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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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휘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