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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는 동백 궁에서..

#03..



"무슨 소릴 하는지 모르겠군."
"시치미 떼지 마십시오! 동백 궁 근처로 정확히 반경 10km만 눈이 왔고 나머진 남쪽 도시답게 멀쩡한 날씨입니다! 이게 과학적으로 말이 되는 겁니까!"
그러나 이 세계에는 과학과 다른 것이 공존하고 있었다.
"과학은 내 전문이 아냐."
"그럼 역시 마법 관련이군요."
"윽! 그러니까 나는……!"
"공주님, 권속에게까지 숨기는 게 있으면 대체 누구를 믿고 의지할 생각이십니까."
공주의 말을 자르며 이호가 진지하게 말했다. 조용한 말투였지만 그 속에 작은 분노가 담겨 있었다.
"권속이라고?"

공주는 코웃음을 쳤다.
"내 권속들은 다 죽었다. 그 입을 함부로 놀리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이러쿵저러쿵 해도 너희는 결국 이방인이니까."
"그래서 숨기시는 겁니까?"
이호는 비난하는 게 아니라 그저 묻고 있었다. 하지만 그 시선이 불편한 공주는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공주님."
이호가 재차 대답을 요구하듯이 불렀다. 공주는 다시 정면으로 이호를 마주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는 윗사람이라는 특유의 오만함이 남아 있기는 했으나 거기에는 어떤 슬픔이 서려 있었다.
"숨기는 게 아니라…… 정확한 건 나도 몰라."
"하지만 짐작하고 계시는 이유가 분명 있으신 게 아닙니까. 공주님, 이건 앞으로 저희가 공주님을 호위하는 데 중대한 문제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 말에 공주는 저도 모르게 한 손을 주먹 쥐었다. 드레스의 치마 자락에 가려 이호에게는 보이지 않을 테지만 그녀의 어깨가 뻣뻣하게 굳어지는 모습에 이호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러나 말씀하신대로 저희는 서국의 기사들, 이 이상은 외교 문제로 커지는 걸 바라지 않습니다."
"재밌는 말을 하는군. 여기 있는 이상 충분히 외교적인 문제가 있었으리라고 보는데."
"그건 주군의 일이십니다."
"너희 주인이 부러워."
"과찬이십니다."
"그리고 바보지. 아무리 대비원국의 공주라 해도 서열로 보나 뭘로 보나 나을 게 하나 없는 내게 왜 이렇게 집착하는지."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그것은 이호 역시 궁금하던 일이었다. 하지만 주군의 일에 토를 달아본 적 없는 그로서는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일 따름이었다. 오히려 공주가 그 호의를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는 게 의아했다. 그의 얼굴에 떠오른 의문을 읽어낸 공주가,
"그럼 자네는 대답할 수 있나? 서국의 왕자님께서 친히 권속을 보낸 이유를."
바로 본론을 꺼냈다. 이호는 잠시 생각에 잠기면서 전에도 이와 비슷한 질문을 받은 것 같다고 느꼈다.
"공주님께서도 이미 짐작하고 계시는 이유입니다."
"말도 안 돼!"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공주가 대꾸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렇잖아! 만약에 이호라면, 몇 십 년 동안 다른 나라에서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여자를 신부로 맞이하고 싶은 생각이 든단 말이야? 그것도 그 나라에서는 벌써 포기한 그런 여자를?!"
"제 기억이 맞다면 한 번 정도는 만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뭐라고?!"
공주는 깜짝 놀라면서 재빨리 머리를 굴리며 생각에 잠겼다. 이호의 말이 사실이라면 분명 어딘가에서 왕자라는 인간을 본 적이 있어야 할 텐데, 그런 기억은 전혀 없었다. 외국의 왕자였다면 영접실 이런 데서라도 봤을지 모른다. 하지만 공주는 그런 곳과 인연이 없었다. 한 나라의 공주가 ―그것도 무의미하게 여섯이나 있는 공주 중 한 명일 뿐이다.― 궁 밖의 사람들과 만날 일이 있다면 연회 정도의 자리뿐인데 거기서도 왕자란 사람을 소개 받거나 만난 기억은 결코, 절대로 없었다.

공주가 그렇게 기억해내기 위해 양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붙들면서 끙끙대자 이호는 참지 못하고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이호!"
"실례했습니다. 만나신 적이 있으실 테지만 주군의 일이니 아마 평범하게는 만나지 않으셨을 듯합니다."
"호오~? 이웃 나라의 왕자님께서는 연극을 좋아한다는 소문이 자자하던데 실제로도 그러신가보지?"
이호의 비웃음을 산 게 분해서 공주의 말투는 꼬여 있었다.
"비국에서는 왕자님에 대한 소문이 무성하더군요. 공주님께서는 그 소문들을 다 믿고 계십니까?"
"그럴 리가. 소문은 소문일 뿐이지."
그리고 소문의 가짓수로 치자면 공주 자신에 대한 소문이 더 풍성할 것이란 걸 잘 알고 있기에 공주는 그런 것을 신경 쓰지도, 귀담아 듣지도 않았다. 다만 한 번도 얼굴을 본 적도, 소식을 들은 적도 없는 사람인 데다가 서국의 왕자이니 공식적인 정보나 소문 같은 것―공주가 듣기에 그럴 듯한 소문 같은 것 말이다.―도 관심을 기울이고는 있었다.
"하지만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 서국의 왕자가 넷이나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중 둘째 왕자가 왜 그리도 소문이 많은지 모르겠어. 나 같으면 첫째 왕자를 노릴 텐데 말이야."
서국 왕가의 장남이라면 가까운 미래에 왕위를 이을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그럴 생각도 없으면서 굳이 그런 걸 언급하는 공주를 보고 이호는 미소 지으면서 자신의 주군, 그러니까 그 소문의 둘째 왕자에 대해 떠올리는 듯했다.
"미모로는 제 3 공주님과 제 6 공주님이 가장 뛰어나신다고 들었습니다만,
공주님께는 무리가 아니신지."
"그래, 나 못생겼다! 어쩔래!!"
도저히 말 상대가 되지 않아 약이 오른 공주가 소리를 지르듯이 외쳤다.




-계속-



:
Posted by 휘란


#잠자는 동백 궁에서..


#02..




남자는 예산 문제로 골머리를 앓는 것보다 더 걱정인 게 있었다.
"좋아. 그럼 돈을 벌어 오면 되겠네."
"공주님, 잊고 계시는 것 같아서 거듭 말씀드리지만 '유배'가 아니라 '유폐'이옵니다. 이 두 가지의 차이점을 아셔야……."
"그럼 이대로 굶거나 얼어 죽으란 말이냐?!"
"그렇게는 말씀 드리지 않았습니다. 보시다시피 예산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어디까지 버틸 수 있을지 쉽게 말하면, 간당간당하게 만들어놓고 공주님께서 굴복하시기를 기다리는 것으로 추측되옵니다."
"웃기는군."
기분이 퍽 상했는지 공주는 자리를 박차고 벌떡 일어났다.
"이 내가 굴할 거라고 보는가?"
"소신의 생각일 뿐이옵니다."
"돈 하나로 사람을 비참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감히 날 어쩐다 말이냐! 어차피 재물이란 있다가도 없는 것, 이 정도로……."
그런데 그 순간 공주의 뱃속에서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났다.
남자는 풋! 하고 웃음을 참지 못했다. 공주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소야!!"
"예, 죄송합니다. 곧 식사를 대령하겠습니다."
"그런 게 아냐!!"
"네, 알고 있습니다. 어찌됐든 곧 식사 시간이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런 게 아니라니까!!"
"네, 네."
공주는 화제를 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보다 이호는 어디 있지?"
"글쎄요. 또 경비다 뭐다 하면서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지 않을까요?"
"확실히 그건 쓸데없는 짓이네. 내가 찾아볼게."
공주가 방 밖으로 나가는 걸 소야가 말리려는데 동시에 문이 열리면서 누군가 들어왔다.
"어딜 가시는 겁니까."
"이호 너 찾으러 간다!"
밖에 나갈 필요가 없어진 공주가 조금 비꼬듯이 말했다.
그 말을 이해하는데 잠시 시간이 걸린 이호는 고개를 갸웃거린 뒤,
"제가 왔으니 됐지 않습니까. 무슨 볼 일이시라도……?"
"아니, 됐어."
"그럼 공주님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저는 식사 준비를 해야 해서 이만 실례하지요."
소야가 그렇게 말하고 방에서 물러났다. 그가 가는 걸 확인한 후에야 이호가 공주 쪽으로 다가와 말했다.
"공주님, 동백 궁의 경비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습니다. 헌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더군요."
"아, 혹시 날씨에 대해 투덜거리는 거라면 내게 말하지 마. 난 아무 것도 모르니까."
"그렇다면 더더욱 여쭤보겠습니다. 왜 이 곳 라피스에서 동백 궁만 이렇게 한겨울인지!"
올 것이 왔구나 하고 생각하는 듯 공주의 표정은 복잡했다.





-계속-

:
Posted by 휘란

※네이버 블로그와 동시에 포스팅하고 있습니다.^^;




#잠자는 동백 궁에서


#01..


 실내에서 신발을 신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발끝에서부터 차디찬 냉기가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언제나 추운 곳. 4계절이라는 온난 기후가 무색하게, 말하자면 계절마저 비켜가는 듯한 그런 곳. 비국의 남쪽에 위치하면서도 거짓말같이 추운 동백 궁전. 그 곳의 겨울은 혹독하고 잔인했다.
이미 발목 위까지 쌓인 눈을 멀리서 바라보며 공주는 한숨을 쉬었다.

 동백 궁의 뒤뜰에는 강으로 이어지는 길이 있었지만 가시나무와 덤불로 막아져 있어 빠져나가는 건 불가능했다. 정원사가 손 쓸 방도가 없을 정도로 무성하게 울타리가 된 뒤뜰을 보고 공주는 머나먼 이국의 동화인 '잠자는 숲속의 미녀'에 대해 떠올렸다.

 죽음 대신 잠이 든 공주를 위해 죄도 없고 관계없는 성 안의 사람들까지 끌어들여 모두 재운 뒤, 그 성을 지키기 위한 기사로 선택된 것이 찔레나무였다. 찔레나무는 가시를 가지고 있어 서로 얽히고설키어 쉽게 성으로 침입을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뒤뜰의 풍경이 꼭 그와 같은 형상을 연상시켰다. 하지만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니 공주는 그 이야기가 사실은 공주를 가둬두기 위한 좋은 감옥이 아니었을까 하는 상상마저 들기 시작했다.
아무리 잠이 든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서라지만 그렇다고 도둑도 아니고 그녀를 구하러 가기 위해 가는 사람들조차 찔레나무의 가시에 찔리고 죽고 100년 동안 그런 일이 계속되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동화이기에 가능한 이야기.

"하아……."

 다시 한 번 공주의 입에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현실은 동화보다 잔혹한 법이다.
실제로 그녀는 동백 궁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잠이 든 것도 아닌데, 차라리 잠든다면 꿈이라도 꿀 테지만 그럴 수도 없는 현실이 칼바람보다 매서웠다.

 그런 공주의 뒤로 누군가가 조심히 다가와 꾸벅 인사를 했다. 소리도 내지 않고 고개를 숙인 인사였는데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공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

"추워. 날 얼려죽일 작정인가?"
"송구하옵니다. 허나 본궁에서의 지원이 끊긴 이상 예산이……."

미처 말을 맺지 못한 남자가 조용히 장부 같은 것을 공주에게 내밀었다.
그걸 들여다본 공주는 얼굴을 찡그리며 거친 말을 내뱉었다.

"빌어먹을!"
"고, 공주님. 부디 말씀을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누가 들을까 두렵습니다."
"누가? 아직도 날 감시할 이유가 있나?"
"일단 진정하십시오."

공주가 계속 언성을 높이자 남자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렸다.

"후우. 그래, 이 예산으로 언제까지 버틸 수 있다고?"
"바람달까지는 무리입니다."

지금은 겨울 서리달로, 바람달이 곧 봄의 처음이므로 앞으로도 약 3개월은 더 남아 있는 셈이었다.

"그렇다고 바람달이 된다 해서 별 뾰족한 수도 없지."
"……그렇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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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휘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