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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3. 22. 20:49

재와 빨강 - 편혜영 책 속 여행2017. 3. 22. 20:49

2017년 3월 14일~3월 21일 완독.

도서관 대출.

 

 

그렇게 두껍지 않아서 금방 읽을 수 있을 거라 예상했던 것과 달리

기대한 내용이 아니라서 지지부진하게 읽었다.

어쨌든 다 읽었다.

 

 

  위험에 대한 경고는 언제나 실제로 닥쳐오는 위험보다 많지만 막상 위험이 닥칠 때는 어떤 경고도 없는 법이었다. (8쪽)

 

  상점은 모두 문을 닫았다. Y시는 상점의 영업시간을 밤 여덟 시까지로 제한하고 있었다. 시의회에서 법률로 제정한 사항이었다. 상업 종사자의 생존권보다 인간적 삶의 가치를 보호하겠다는 취지였다. 시민들은 생계를 유지하는 것 이상으로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 노력할 의무가 있었다. Y시가 시민들에게 바라는 것은 일정한 수준의 교양을 갖추는 일이었다. 그러기 위해서 어떤 불편이 있고 경제적 손실을 감수하더라도 삶의 여유를 확보해야 한다고 믿었다. (중략)

   이런 악취 속에서 어떻게 인간적인 삶이 보장될지, 시간이 주어진다면 교양이라는 게 자동으로 생기는지 의문이었으나 악취 속에 있으면 금세 동화되어 느낄 수조차 없게 된다는 걸 택시에서 내려 걸어오는 동안 실감했다. 쓰레기가 이 정도로 방치된 것도 수거인들이 삶의 질을 보장받기 위해 적극적으로 의사를 표출한 방식일 것이다. 그러자 아무리 쓰레기가 썩어가는 도시라도, 악취를 풍기는 도시라도 인간적인 삶이란 유지되어야 마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도에 깔린 쓰레기를 밟으며 숙소로 가는 동안 그는 C국에서라면 자신에게도 강제된 여유와 교양, 인간적인 삶이라는 게 냉큼 생겨날 것만 같아 즐거워지기까지 했다. (21~22쪽)

 

  밤의 아파트는 덩치 큰 순한 개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22쪽)

 

  겨우 초급과정만 마친 그는 C국의 언어로 지극히 단순한 감정적인 것과 유아적이고 원초적인 욕구만을 표현할 수 있었다. 기본적인 상태는 표현할 수 있으나 구체적인 대상과 질량을 말할 수 없었다. 마음에 이는 비교적 선명한 감정은 전달할 수 있으나 왜 그런 상태에 이르렀는지는 설명할 수 없었다. 의사나 요구를 표현할 때는 정중한 방법을 몰라 직설적으로 명령하거나 지시하는 문형을 자주 사용했고 그 때문에 강사에게 외국어로 말할 때 권위적이고 차가워 보인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 (33쪽)

 

생각해보니 유난히 애착을 갖고 챙겨온 물건 같은 게 없었다. 세계가 담긴 것처럼 무거웠던 트렁크는 단지 무게가 나가는 하찮은 물건들의 집합에 불과헀다. 당장 갈아입을 옷이 없어 불편하겠지만, 다행히 잃어버린 것들은 C국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었다. (중략) 그러니까 돈만 있으면 언제든 구할 수 있는 것들을 담아오느라 트렁크가 그처럼 무거웠던 것이다. (40쪽)

 

  모든 비관은 결국 예상된 결과를 가져오게 마련이었다. (41쪽)

 

사내에게 얻어맞은 순간, 그는 자신이 이제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세계에 들어섰음을, 도덕과 질서와 교양과 친절이 정당한 세계에서 약탈과 노략질과 폭력과 쓰레기가 정당한 세계로 진입했음을 깨달았다. 새로운 세계에서의 생존방식은 그를 가격한 사내의 방식일 거였다. 약탈과 노략질이 생계의 방편이라면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게 유일한 자산이었다. (55쪽)

 

'나는 내 자신에 대한 대가로

스스로를 고스란히 내놓아야 하며,

인생에 대한 대가로 인생을 바쳐야 한다.'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공짜는 없다」『끝과 시작』(문학과지성사 2007)에서

(71쪽)

 

그를 위해서 아내는 반드시 부정해야만 했다. 그는 자신의 잘못된 생각으로 결혼이 파탄나고 사랑하는 사람이 고통스러웠다는 것을, 즉 자신이 모든 것을 망쳐버린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를 실패에 빠뜨린 것은 부정한 아내이거나 의심을 부추긴 세계여야 했다. (74쪽)

 

그러니까 두 사람의 인생과는 하등 상관이 없고 그 말을 한다고 해서 무엇도 바뀌지 않으며, 말을 하지 않더라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게 분명한, 사소하고도 불필요해서 남들에게는 바보처럼 들리는 얘기들이었다. (77쪽)

 

그들은 부끄럽거나 그립거나 되돌리고 싶거나 되돌리고 싶지 않은 지난 일을 여러 번 되풀이해 말하면서 서로 겹쳐 있지 않던 시절을 유감스러워하며 흔쾌히 그 시절의 목격자가 되어주었다. 또한 사소한 하찮아서 곧 기억에서 사라질 게 분명한 현재에 기꺼이 동참해주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각오나 희망에 대해서, 그것을 실행하려는 의지에 대해서, 맥없이 꺾여버린 의지에 대해서도 자주 얘기를 나눴는데 그럴 때는 과장되지 않은 격려와 진심어린 위로, 소박한 응원의 말을 주고받았다. (77~78쪽)

 

"잘 아시겠지만 오랜만에 닿은 연락일수록 반갑지 않은 법이어서요. 찾는 분에게 번호를 알려드리고 전화를 드리라고 전하겠습니다." (85쪽)

 

  사실 외국에서는 오래전부터 전문성을 인정받아 쥐 소탕 전문가가 별도의 직업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직업이 분리되어야 할 만큼 도시에 쥐가 많은지 의심쩍어하는 사람이 있지만, 쥐는 어디든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보다 많다. 사는 곳에서 한번도 쥐를 보지 못했다고 해서 쥐가 없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쥐는 사람들에게 목격된 곳에도 있고 한번도 목격된 적 없는 곳에도 있으며 결코 나타날 리 없다고 생각하는 곳에도, 그러니까 모든 곳에, 어디에나 있다. (113쪽)

 

쥐를 제거하면 제거할수록 살아남은 쥐들이 버틸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셈이다. 살아남은 쥐들은 한층 강해진다. 본래 멸종에의 위협은 종(種)을 강화시키는 법이다.

  인간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어떤 바이러스도 지구상의 인간을 다 죽일 수는 없다. 99.99퍼센트가 죽는다고 해도 자연면역을 갖춘 생존자는 반드시 살아남는다. 독성 강한 쥐약이 오히려 생존력 강한 쥐를 양산하듯이, 전염병은 사실상 인간이라는 종을 강화시키는 데 일조한다. 쥐와 마찬가지로 인간도 쉽게 소탕되는 종이 아니다. (116~117쪽)

 

마음이 아파 죽는 때가 온다면 아마 지금과 같은 순간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고통은 오래가지 않았다. 흙바닥에 누워 비를 맞고 있자니 추워서 죽을 수는 있지만 마음이 아파서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아무리 마음이 아팠던 순간에도 그는 살아 있었다. 다시는 이런 순간을 맞고 싶지 않을 만큼 힘들었으나 적어도 그때에는 비를 맞지 않았고 땅바닥에 드러눕지 않았으며 스멀거리며 올라와 몸을 간질이는 것이 벌레인지 습기인지 흙의 찬 기운인지 생각하느라 인상을 쓰지 않아도 되었고 그것이 굵은 빗줄기로 땅이 파이면서 정체를 드러내 벌레라는 것을 확인하고 매번 짧은 비명을 참느라 애쓸 필요도 없었다. (129~130쪽)


그는 자신에게서 기인하여 현재에 이른 모든 일을 이해하는 것을 포기했다. 어쩌면 이해하고 싶지 않거나 애당초 이해할 수 없는 일인지도 몰랐다. 자신의 처지에 대한 이해나 체념, 수용이나 오해와 상관없이 그가 짐작하는 것은 이제껏 아무리 힘든 고통을 겪었다고 하더라도 그에게 다가올 예측할 수 없는 미래의 고통보다는 나으리라는 점이었다. 그를 우울하게 하는 것은 이것이었다. 지금의 고통은 앞으로 닥칠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지금의 세계가 과거가 될 때까지 살아남는 것이었다. (131쪽)


전염에의 두려움이 동정심을 억눌렀다. 이미 쓰레기처럼 살아가는 처지지만 스스로 죽음과 삶을 선택할 수 없다는 점에서 전염병은 치명적이었다. 대단한 삶의 의지를 가져서가 아니었다. 단지 죽는 게 두려웠다. (146쪽)


잔불은 오랫동안 남아 밤을 밝혔고 영혼처럼 가벼운 재가 밤새도록 공원을 떠돌아다녔다. (151쪽)


그런 여행이 몇군데 관광지를 돈 후에 점을 찍듯이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 대형쇼핑쎈터에 들러 이민자가 판매하는 라텍스나 싸파이어, 루비, 상황버섯 같은 것에 대한 긴 설명을 듣는 일에 시간을 쓰고 불가피하게 가이드의 눈치를 보며 필요없고 조잡한 물건을 비싼 가격에 사야 하는 줄 알았으나 그런 일정마저 없이 종일 둘만 남겨지는 것도 어색할 것 같아서였다. (154쪽)


  걱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 일까지 미리 염려하기에 미래는 너무나도 까마득했다. 그가 생각할 수 있는 건 오로지 과거의 시간이었다. 현재는 버티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미래는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넓고 방대해서 멀고도 멀었다. 어차피 그가 미래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그것이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이라는 것뿐이었다. 석유처럼 검은 하수를 바라보고 있으면 시간이 언제나 제 할일을 하는 건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시간은 진창 속에 빠져 있기도 하고 오물과 섞이느로 더디 흐르기도 한다. 그러니 미래는 아예 오지 않을 수도 있었다. (167쪽)


그들은, 죽은 사람은 더럽고 불결한 세균덩어리에 불과하지만 정작 해를 가하는 것은 산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죽은 것들을 방치하는 일에는 비교적 관대했다. 그게 무엇이든, 내장이 터져 죽은 쥐라고 해도, 죽은 것은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았다. (177쪽)


일상은 목을 가눌 수 없는 갓난아기와도 같았다. 평온히 엎드려 자는 듯 보이지만 언제나 돌연사의 위험을 안고 있는 갓난아기였다. 제멋대로 두었다가는 목이 꺾이거나 침대에서 굴러 부상을 입거나 얼굴을 침구에 박고 숨을 거둘 수 있었다. 그러니 계속 돌보지 않을 수 없었다. (179~180쪽)


전염병이 사람들에게 미친 가장 큰 영향은 질병을 옮겨 사망에 이르게 한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다른 사람을 의심하게 한 것이었다. 자신을 제외한 사람들은 잠정적인 병균이었으며 집밖은 바이러스가 부유하는 더럽기 짝이 없는 공간이었다. (180쪽)


노인의 얘기를 들으면서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생각하자 무척 조급해졌는데, 뜻밖에도 자신에게 생긴 조급함이 마음에 들었다. 조급함이나 두려움은 미래에 대한 기대에서 생기는 거였다. 미래를 기대하지 않는다면 어떤 것도 서둘고 싶지 않은 법이었다. (187쪽)




***여기서 소설 결말이나 전체 내용에 대한 강력한 미리니름이 있음을 밝힙니다. 주의하세요!!***



김연수의 '소설가의 일'에서였나, 아니면 다른 책이었나. 명확히 기억나지 않는데...

이야기라는 게... 이미 나올 대로 나왔고 같은 이야기를 다르게 반복하고 있는 거라고.

이 작품을 읽으면서 비슷한 소재를 다뤘다는 이유 하나로 정유정의 '28'을 떠올렸다.

주인공의 타락이랄까... 이걸 과연 타락이라고 봐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타락의 뜻은 올바른 길에서 벗어나 잘못된 길로 빠지는 길이란 의미라고 나와 있으니까.

주인공의 타락에서는-본인이 자초한 면이 꽤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반성 없고 순전히 운으로 인생이 풀려가는 모습에 좀 짜증났다.- 김동인의 '감자'가 떠올랐다. 

아, 불쌍한 복녀. 

차이점은 이 작품의 주인공에게는 일말의 동정심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

이혼했다고는 하지만 아내였던 여자를 죽여놓고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느끼는 감정이 기이한 안도감이라니.

'종의 기원'(정유정)의 주인공보다 더 질이 나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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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휘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