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진기행 외 김승옥소설집(1) <서울의 달빛 0章> - 김승옥 책 속 여행2015. 2. 26. 11:23
2월이 3일 가량 남은 오늘, 2월 목표였던 책 4권 중 완독한 도서가 없음을 알고 부랴부랴 이어서 읽기 시작. 그것은 흡사 방학이 끝나가는 시점에서 방학숙제를 몰아서 하는 아이의 심정이었다.
<무진기행>은 책모임 선정 도서였다.
그래서 이미 2월 14일에 읽고 토론까지 마친 상태인데 포스팅은 미루고 있었다.
모임 때 알게 된 건 <무진기행>이 꽤 여러 가지 버전(?)이 있다는 것으로 그 단편소설 하나만 실린 책도 있었다.
다른 단편도 이야기할 듯하여 열심히 읽었지만
공교롭게도 그 책을 집어든 시간이 14일 자정이었던 탓에 5편 가량 밖에 읽지 못했다.
여러 버전이 있다는 이유로 <무진기행>에 대해 먼저 논의한 후 다른 단편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라는 걸로 시작했는데
이게 웬걸. 그 작품만으로도 토론 시간이 부족했다.
토론이 끝난 이후 저녁 식사 때와 티타임 때도 '무진기행'에 대한 이야기는 간간이 이어졌고
그게 무척 즐거웠다.
그렇게 무궁무진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작품이라는 것에 놀랐다.
내가 갖고 있는 <무진기행>은 민음사 것으로 총 10편의 단편이 실려 있었다.
그런데 문학동네 것은 15편으로, 심지어 작가의 말과 출판 연도 순으로 실려 있어서
염치 불구하고 지인에게 책을 빌려 왔다.
빌려 왔는데 또 읽지를 않고 내버려두기를 열하루 정도 되었고 2월은 짧은 관계로
서둘러 읽게 된 것이다.
작가의 말
소설 쓰기는 나에게는 신성한 것이었다. 소설을 구상하고 파지를 내가며 지금 쓰고 있는 장면의 의미를 정리하는 동안은 인생의 혼란과 무의미감에서 일시적으로나마 벗어나 이 세계가 제법 조리 있어 보이고 의미 있어 보이는 구원의 시간이 되는 것이었다.(6쪽)
하나님의 빛이 밝을수록 인간들의 어둠은 더욱 고통스러워 보였다. 무신론자 또는 불가지론자였던 시절에는 인간들의 어둠이 때로는 귀엽기도 하고 아름다워 보인 적도 있었는데 말이다.(7쪽)
1960년대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내가 써낸 소설들은 한낱 지독한 염세주의자의 기괴한 독백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1960년대라는 조명을 받음으로써 비로소 소설들은 일상적인 모습으로 동작하는 것이다.(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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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분 읽을 때, '작가도 알고 있구나. 본인 소설이 꽤 기괴한 독백이란 걸.' 하고 웃었다.
작가가 자신의 작품을 해설한다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짓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앙드레 지드의 지적대로 한 편의 소설 속에는 작가의 몫과 독자의 몫과 신(神)의 몫이 있기 때문이다.(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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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서울의 달빛 0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책 뒤편에 있어서 이 부분을 읽을 때는 읽지 못한 상태였다가 이 부분을 읽고 먼저 읽어보았다.
작가 자신은 장편소설의 서두라고 썼는데
이어령이 다음 원고를 기대하는 건 어리석고 이 0장만으로도 단편소설의 완성도를 지니고 있다고 평가한 작품이니 읽기 전에 기대치가 높아지는 건 당연했다.
읽고 난 감상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나는 역시 이 작가를 좋아하기 힘들다는 것?
무라카미 하루키도 싫고 우울하고 답답한 프랑스 문학도 싫다고 하면
내 취향과 수준이 드러날 것이다.
만약 누가 왜 싫냐고 이유를 묻는다면 할 말도 없다. 나도 모르니까.
한 가지는 말할 수 있다.
작가들의 모든 작품을 읽지는 않았으니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가 있을지도 모르나
어쨌든 내가 읽어본 작가들의 작품들의 범위 내에서
김승옥이나 무라카미나 '여자'를 굉장히 경멸하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성욕의 처리 수단 혹은 욕망의 대상.
한 번도 긍정적인 존재로 나온 적이 없었다.
마치 주인공인 '나'라는 남자가 버리고 싶은 찌꺼기 마냥.
작품을 읽고 있으면 작품 속의 여자가 내가 아닌데도 저절로 얼굴이 찡그려지고
주인공인 남자뿐만 아니라 작가에게마저 불쾌감이 드는 것이었다.
남자의 에고이즘으로 똘똘 뭉친 작품들이 문학사적으로 엄청난 평가를 받는 것도 뭔가 아니꼽고.
여성 작가들의 작품들을 떠올려보니 당연히 그 반대의 경우는 없거니와
남자를 '수단'으로 여기거나 관계에서 구토하는 경우는 더더욱 없었으므로
이 <서울의 달빛 0章>은 남성향으로서 진수를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더구나 순문학으로 인정 받으니 대중문학도 시대적 배경만 잘 끼고 들어가면 두 문학의 분류가 그저 '분류'에 불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서울의 달빛 0章>을 읽고 있을 때는 조금 구토증이 느껴진다 싶더니만
여기에 포스팅하려고 작품을 다시 읽으려고 하니 (빌린 책만 아니라면) 책 위에 토하고 싶어졌다.
이기사는 그렇게 말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나는 차에 대하여 그렇게 자질구레한 신경을 쓰게 되는 것은 싫었다.항상 완전하여 그냥 몰아대기만 하면 되는 차가 내가 바라는 차였다. "그런 차가 어디 있겠어요? 쇠로 되고 바퀴가 달렸다 뿐이지 살아 있는 말이라고 생각해야 돼요. 좋은 사료를 먹여주고 과로시키지 말고 병이 났나 살펴봐주고 외양도 항상 깨끗하게 해줘야 되고……"
이기사는 말에다 비유하며 말하고 있었지만 나는 여자에다 비유하며 들었다. 문득, 결국 나는 여자를 필요로 하고 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375쪽)
나는 모든 타인들에게 그들이 나의 타인임을 분명히 해두고 싶었다. 아니 그들이 내가 자기네의 타인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었다. 아내는 말할 것도 없고, 어머니와 형님까지도 나로서는 타인이 아닐 수 없었다. 한 여자와 결혼을 하면서부터 내가 그들로부터 분리되는 것을 나는 온몸으로 느꼈다. 그들은 얼마간의 재산과 함께 나를 자기들로부터 떼어버린 것이었다. 결혼 이후 그들이 나에게 묻는 것은 돈과 관계된 것만이었다. 내 얼굴에 버짐이 피더라도 그건 이제 나 자신과 아내가 책임질 일이지 어머니나 형님이 걱정해선 안 될 일이었다.(377쪽)
나한테 왜 자동차가 필요할 것인가! 그런데 이기사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동차를 여자에 비유해보고 있으려니, 그 구매 동기를 무작정이라고 스스로 여기고 있던 차가 실은 아내의 대체물이라고 문득 깨달아지며 내 속에 굴을 파고 둥우리르 틀어 앉아버린 여자라는 독충에 대하여 짓이겨주고 싶은 혐오감이 드는 것이었다.(3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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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차 이름이 레코드라고 나오는데
혹시 옛날 차종으로 있는 진짜 이름일까 싶어서 검색했더니 정말 나왔다. 와우~
당시 제일 비싼 차... 그런 느낌이다.
인간은 행복할 자격이 있는가? 먹을 것이 부족하던 시절에는 생선시장의 개들처럼 꼬리를 뒷다리 사이에 감아넣고 눈을 슬프게 치켜뜨고 다니다가 형편이 좀 나아지면 발정한 개들처럼 닥치는 대로 붙을 자리만 찾아다닌다. 사람들이 결국 바라는 건 필요 이상의 음식, 필요 이상의 교미, 섹스의 가수요(假需要). 부잣집 며느리 여름철에 연탄 사모으듯, 남의 아내건 남의 아내가 될 여자건 닥치는 대로 붙는다. 남의 사랑을 위한 빈자리를 남겨두지 않는다. 물처럼, 공기처럼, 여력만 있으면 빈자리를 메우려 든다. 인간은 자연인가? 메우고 썩힌다. 썩은 사타구니에서 쏟아지는 썩은 감정. 자리를 찾지 못한 자들의 증오. 평화가 만든 여유. 여유가 만든 가수요. 가수요가 만든 부패. 부패가 만드는 증오. 부패는 이미 시작되었으며 남은 일은 증오의 누적, 그리하여 전쟁. 전쟁으로 모두 빼앗기고 다시 시작. 인간은 행복할 자격이 있는가?(3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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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큰따옴표, 쉼표 구분도 없이 '나'와 아내가 나누는 대화가 나오는데
지금 든 생각이지만
만약 아내 시점에서 누군가(난 쓰기 싫어) 글을 써준다면...
이 작품의 장르는 완전히 달라지지 않을까?
이런 찌질이랑 사는 아내가 불쌍해. 이혼 잘한 거야.
그렇지만 그런 희망이 얼마나 허망한 결과로 나타나는지는 정부에서 설명 안 해줘도 누구나 알고 있어요. 그래요, 모두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슬픔예요. 그 슬픔은 특히 남자들을 사로잡고 있어요. 그 슬픔이 남자들의 윤리를 허물어뜨려요. 윤리란 미래적인 거죠. 우리에겐 미래가 없는 거예요. 그리고 허물어진 남자들이 여자를 지배하고 있구요. 그래서 모두 슬픈 거예요.(384쪽)
우선 여배우란 직업은 일종의 사업이야. 가정이란 것도 하나의 사업이구. 한꺼번에 두 가지 사업을 둘 다 잘 경영한다는 건 힘든 거야. 결혼할 때 그 직업은 그만두게 해야 했어. 네 와이프는 화가지? 달라, 여배우란 특수한 직업이야. 그 육체 자체가 대중의 소유야. 여배우 자신이 그걸 잘 알고 있어. 대중의 소유물을 너 혼자 독점하려면 대중들이 그 여자에게 줄 수 있는 것 이상을 네가 줄 수 있어야 해. 대중들이 부러워할 명예라든가 어마어마한 돈이라든가 그 여자가 무슨 짓을 하든지 얼마든지 용서할 수 있는 사랑이라든가. 비싼 창녀란 말이군. 남편은 기생의 기둥서방이 되란 거구. 여자 중의 여자란 말이지. 모든 여자란 규모가 크고 작을 뿐 다 그런 거야. 만족의 한계가 좁달 뿐 아무리 평범한 여자도 다른 남자가 주는 것 이상을 줄 때 독점할 수 있는 거야. 남녀관계란 근본적으로 경제적 관계야. 남자끼리의 관계만 사상적 관계지. 부자와 가난뱅이도 같은 취미로써 친구로 지내거든.
(398~399쪽)
탐욕적인 청춘, 이기적인 중년, 발기되는 노년들이 물처럼 공기처럼 빈자리를 메우려 드는 세계. 우리의 삼각형은 그들 틈에 우글쭈글 뒤틀려 잠시 끼어 있을 뿐.(4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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