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 구성 원리로서의 동일화 - 정호근 외 책 속 여행2012. 4. 20. 10:22
우리는 일반적으로 사고와 의사소통을 위해 사용하는 개념은 외부의 대상에 상응하는 것이고, 또 개념을 대상에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개념은 대상과 질적으로 다르다. 대상이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것이라면 개념은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것이다. 예를 들어 '책상'이라는 하나의 명칭으로 부르는 책상들은 실제로는 비록 작은 차이일지라도 모두 다르다. 이렇듯 개념은 같지 않은 것은 배제하고 같은 것을 추상화하여 포섭하는 하나의 의미 범주이다. '책상'이라는 개념은 여러 책상들에 대해서 보편적으로 적용되며, 개별적 사물인 책상들은 보편적 개념인 '책상'의 한 사례로 파악된다.
대상들은 그들을 구별하는 특성인 질(質)이 사상(捨象)※되면 같은 성질의 것이 되고, 이는 양적인 크기로 환원될 수 있다. 과학적 시각에서는 '이 책상'의 고유성은 문제 삼지 않으며, 그것들은 양적인 크기로서만 관심의 대상이 된다. 질이 빠지고 양적인 한계로 고찰되기 때문에 계산이 가능해진다. 바로 이것이 자연 과학의 눈부신 발전을 가능하게 한 원동력이다.
대상을 동일화하는 이성과 개념은 고유한 존재인 대상에 대해 '다른 것'이라는 차이를 배제한다는 점에서 폭력적이라고 할 수 있다. 대상인 '어떤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한, 그것은 두려움의 대상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어떤 것'이 이미 알고 있는 것과 동일화될 때, 즉 개념화될 때 그것은 더 이상 낯선 것이 아닌 알려진 것이 되며, 두려움의 대상이 아닌 지배 가능한 대상이 된다.
인간은 두 가지 차원에서 낯선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면서 세계와 교섭한다. 하나는 세계와의 인식적인 관계로서 세계를 자신의 개념 틀로 파악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세계가 인간의 실천적인 맥락에 들어오는 것인데, 인간은 노동을 통해 자연을 자신에게 유용한 것으로 가공하고 변화시킨다. 이 과정이 바로 동일화이며, 인간은 이를 통해 낯선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듦으로써 위협적인 자연으로부터 자신을 보존할 수 있었다. 주체가 객체와 만나는 이러한 방식에는 동일화를 하려는 이성이 작용하고 있으며, 이런 이성은 대상에 대한 지배와 연루되어 있다.
동일화는 사고와 행위의 차원에서만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서도 확인된다. 그러므로 동일화는 문명을 구성하는 원리라고 할 수 있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이 문명의 원리를 서구의 태고적 문헌 '오디세이'까지 추적하는데, 이들의 시선은 단순한 복고에 머무르지 않고 오늘의 문명까지 관통하고 있다. 집과 길, 머무름과 떠남의 구별은 정신과 자연, 이성과 감성, 남성과 여성 등 인류의 사고를 규정해 온 뿌리 깊은 이분법과 연결되어 있다. 집은 자연이고, 성적으로는 여성으로 간주된다. 이에 대해 집을 나서는 것은 집이 보장하는 안락함을 떨치고 위험에 몸을 맡기는 것이다. 자연 상태에 빠져 있는 한 정신은 형성되지 않는다. 정신은 자연적 충동을 억제하고 자연을 극복할 때 도야되는 것이다. 자연을 극복하는 역할은 남성에게 할당된다. '여성은 보호 본응이 있다'라는 식으로 여성을 자연과 연결짓거나, '남자는 울면 안 된다'라는 식으로 남성을 감정을 억제하는 이성으로 정형화하는 것은 오늘날도 어린 시절부터 개인의 사회화 과정에서 반복되고 있다. 이것이 바로 분명을 구성하는 원리로서의 동일화이다.
※사상(捨象): 현상의 특성·공통성 이외의 요소를 버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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