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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민지 사학의 여독으로 인해 우리에게 있어서 대원군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아직 부정적인 경향이 있으나 이는 잘못 배운 역사이다. 대원군은 조선 왕조사에서 가장 영명한 지도자 중의 하나였는데, 그가 이러한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것은 그의 개혁 의지 때문이다.
  대원군의 개혁으로서 먼저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서원의 철폐였다. 320년의 전통을 가지고 있는 서원 600여 개 중에서 47개만 남기고 나머지를 철폐하는 데에는 대단한 저항과 모험이 수반되는 것이어서 이에 대한 반대 여론도 많았으나 대원군은 "설령 공자가 다시 살아난다고 해도 이는 용납할 수 없다."는 결연한 의지를 보였다. 이와 같은 서원 철폐는 도탄에 빠져 있던 백성을 구원한다는 애민 의식에서 나온 것이다. 또한 서원 철폐는 주자 예법을 개혁했다는 점과 더불어 중화 사상의 탈피와 이를 통한 자주 의지의 구현이라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을 수 있는 처사였다.
  대원군의 개혁 의지가 겨냥한 두 번째의 사안은 중앙 집권적인 권력의 강화였다. 조선조 후기에 들어와 왕권이 약화된 데에는 군주의 나약과 무능에도 원인이 있었지만, 그보다 중요한 이유로는 조정의 당파가 왕권의 견제 역할을 함으로써 군주의 절대권이 약화되었다는 점과 척신의 세도 정치를 그 원인으로 들 수 있다. 대원군은 군주권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종친부를 강화하여 척족에 대항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종친부의 강화책은 결국 씨족 관념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었고, 더구나 파벌에 초연해야 할 집권자로서 끝내는 당색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에서 비난을 면할 길이 없다.
  대원군의 개혁 의지로서 세 번째로 거론할 수 있는 것은 쇄국책이다. 이 쇄국 정책은 오랫동안 대원군을 역사적으로 비난하는 논거가 되어 왔다. 그러나 문제는 그의 심중을 이해하거나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보이지 않은 채, 쇄국 정책으로 인하여 가장 고통을 겪었던 일본 제국주의자들과 일본 식민지 사학자들의 일방적인 비난이 대원군의 쇄국 정책에 대한 정평이 되어 있다는 것이다. 사실상 오늘의 시점에서 본다면 대원군의 쇄국 정책은 비난받을 여지가 많다. 그러나 당시의 국세 정세와 대원군의 심정을 훑어보면 '개국이야말로 매국이요 망국이요 위국'이라는 대원군의 확신에는 조금도 변함이 없었을 것이다. 그의 정책이 시대착오적인 것이었든 아니든 간에 당신의 그의 결심은 나라를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에서 나온 것임에는 틀림없다.
  대권군은 선악을 함께 갖춘 야누스적 인물이었다. 그는 후대의 사가들에게 비난을 받을 처사도 저질렀고, 칭송받을 처사도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식민지 사학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그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부정적이었다. 그러나 대원군과 빙탄의 관계에 있었던 것으로 인식되고 있는 개화파가 혁명에 성공한 후 표방한 개혁안 제 1조가 "머지않은 날에 천진(天津)에 납치되어 잇는 대원군을 되돌아오게 한다."는 점이었다는 사실은 그가 전적으로 수구적인 인물이기만 했겠는가, 그리고 개화파와 대원군과는 어떤 동질적 목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던가 하는 문제를 재조명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해제: 현대에 이르기까지 대원군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부정적인 데 대한 문제 제기를 하고 있는 글이다. 글쓴이는 대원군을 조선 왕조사에서 뛰어난 지도자의 하나로 평가하고 있는데, 그 근거로 그의 개혁 의지를 들고 있다. 글쓴이는 대원군의 의지, 당시의 시대적 상황 등을 고려하여 대원군의 개혁 의지가 드러난 정책을 살피면서, 그 의의와 한계를 동시에 지적하는 비판적 평가 태도를 보이고 있다.
주제: 대원군의 개혁 의지와 재평가의 필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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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휘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