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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을 읽음으로써 김승옥 단편 중에서

가장 으뜸을 이걸로 꼽았다.

 

앞앞앞(?) 포스팅에서 <확인해본 열다섯 개의 고정관념>의 개인적 순위는 그래서 2위인 걸로.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왜 이 작품이 국어 영역이나 문제집에 소개되지 않는지 의문.

애들이 보고 배울까봐? 훗.

 

 

인생의 한 단계가 얼마나 조리 있게 끝났고 또 얼마나 정연하게 시작되려 하는가?(362쪽)

 

  그렇다고는 하지만 이 해방감이 내가 인생의 한 단계를 조리 있게 끝맺음한 데 대한 보답으로 얻어진 다음 단계에 보너스로서 곁따라온 것 이상이 아님을 나는 잘 안다. 보너스는 어디까지나 보너스, 허상은 어디까지나 허상. 이 해방감이 나의 예정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음을 나는 잘 안다. 오히려 이 해방감은 불청객. 나의 결정되어 있는 미래를 엉뚱한 웃음거리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 함정을 한구석에 숨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 두려워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아무리 두려워하고 아무리 긴장하고 아무리 섬세하게 살펴도 결코 지나친 법은 없었다. 그리고 그 두려움, 그 긴장, 그 조심성은 나에게는 결코 낯선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습관처럼 익숙해 있었다.(362~363쪽)

 

"난 말이지, 여태까지 사람의 양심이 몸 어느 부분에 붙어 있는지 몰랐어. 남들이 흔히 간이 없다, 쓸개가 빠졌다 하길래 양심이 간이나 쓸개에 붙어사는 놈인 줄로만 알고 있었지 뭐야. 그렇지만 이제 알겠어. 양심은 말이지, 사람들의 감은 눈꺼풀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구만 그래. 저 친구 좀 봐. 저 눈꺼풀이 떨리는 걸 보란 말야. 자리를 양보하긴 싫고 미안한 생각은 있어서 말야."(365쪽)

 

  그런 식의 표현 자체에서 나는 마치 비릿한 물이끼 냄새가 풍겨오면 강이 가까웠음을 알 수 있듯 대도회의 세련된 문화와 성인세계의 윤리가 나에게 임박한 것을 느끼며 뭔가 숨쉬기가 답답해졌다. 가난한 지방도시에서는, 그리고 자라나는 유 · 소년 시절엔 옆엣사람을 돌보지 않는 악착스런 경쟁과 경쟁에 진 자의 굴종이 스스럼없이 공존하는 것이다. 그 공존에 불평을 하거나 야유를 한다는 건 가난한 지방도시의 문화와 유 · 소년 시기의 윤리를 파괴하는 것이다. 먼저 타고자 노력을 한 자가 자리를 잡고 앉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그 친구의 빈정거림은 어쩌면 내가 살아왔던 공간과 시간 전부를 모욕하는 것이었다.(366쪽)

 

"편하게 살기가 제일 불편한 거요."(367쪽)

 

 

앞 작품 '들놀이'는 1965년 작, 이 작품은 1972년 작인데..

여기서는 야유회란 표현이 등장한다.

흠..

 

 

내 인생에서 중요한 이 단계를 뒤죽박죽으로 헝클어놓지 말라. 이 단계를 조리있게 끝맺음하지 못했을 때 나를 기다리고 있는 다음 단계가 나를 쌀쌀맞게 취급한다고 해서 나는 어디다 대고 호소할 것인가? 누가 나의 미래를 보장해주는가? 아무것도 없다. 이 경쟁사회가 마련해두고 있는 시험제도밖에는 아무도 나를 보장해줄 건 없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자신을 나는 결코 비겁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비겁한 것은 나의 귀중한 시간과 돈을 나와 한마디 상의도 없이 자기네 멋대로 동원하여 낭비하고 있는 데모의 선동자들이고 그들을 방관하고 있는 학교였다.(368쪽)

 

I believe we must invent our future and we can do it.

(중략)

나는 믿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미래를 발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그리고 믿고 있습니다, 우리는 발명할 수 있다는 것을.(372쪽)

 

 

채만식의 '치숙' 작품이 떠오르는 건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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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휘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