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 여행

환경 철학 - 박이문

휘란 2012. 4. 20. 10:46

  인간은 혼자서는 살 수 없다. 기나긴 진화의 과정에서 인간은 작든 크든 어떤 공동체에 속하지 않고서는 존재할 수 없는 사회적 동물로 변했다. 자신의 속한 공동체 안에서 한 개인은 다른 개인과 상대적으로 얽혀 있다. 따라서 그 공동체 안에서 '나'의 의도와 행동이 함께 존재하는 타자에게 인과적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 '나'의 행동이 타자의 행복에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윤리를 초월한 인간은 존재할 수 없고, 윤리적 테두리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 인간의 삶은 상상할 수 없다. 인간은 필연적으로 윤리적인 동물이다.

  '나'와 타자를 각기 윤리적 주체와 객체라고 한다면, 윤리적 주체와 객체의 이해 관계는 흔히 상충한다. 인간은 삶 속에서 항상 어떤 행동을 선택해야 한다. 윤리적 문제는 인간들 사이에서 피할 수 없는 이해 관계의 갈등에서 생긴다. 이 갈등 관계에서 윤리적 주체인 '나'는 어떤 '선한' 마음을 먹고 어떤 '옳은' 행동을 할 것인지 판단하고 결정해야 한다. 모든 판단이 그러하듯이 선과 악, 옳음과 그름을 판단하는 데에는 어떤 잣대가 전제된다. 윤리학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그러한 잣대로서의 보편적 규범을 제시하고 그 타당성을 뒷받침하는 데에 있다.

  보편적 윤리 규범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지 않는지에 대해서 확실하게 대답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 규범은 윤리 공동체의 범위를 어디까지 할 것인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또 윤리 규범의 타당성은 윤리적 구성원의 한계가 어디까지냐, 즉 윤리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어떤 생물체를 포함하고 어떤 생물체를 타자로 배제할 것이냐에 따라 인정될 수도 있고 부정될 수도 있다. 윤리적 주체는 언제나 각자 '나'이다. 그러나 윤리적 객체인 타자의 범위를 결정하는 것은 언뜻 보기와는 달리 복잡하다.

  인류 계급사의 긴 역사를 보면, 한 사회를 지배하고 잇는 계층의 윤리 공동체에게서 차별받거나 아예 윤리적 배려의 대상이 되지 않는 계층이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는 당시 그리스에 존재하였던 노예 계급을 윤리 공동체 안에 포함하지 않았다. 그에게 노예 계급은 윤리적 객체로서의 타자, 즉 행복과 불행의 배려 대상이 되지 않았다. 따라서 그의 윤리 규범은 그리스 시민들에게만 적용될 수 있을 뿐 노예 계급에는 전혀 해당하지 않는다. 그의 윤리적 범주에 비추어 보면 남에게 악의적 의도나 불필요한 고통을 주는 행동이라도, 그 의도와 행위의 대상자가 그리스 시민이 아니라 노예 계급이라면 악한 것도 옳지 않은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인류 평등 사상은 모든 인간을 차별 없이 윤리 공동체에 포함시키는 것이다. 만약 평등 사상이 진보적 사상이라면, 평등 사상에 근거한 윤리는 전통적 윤리에 비추어 보면 진보적 윤리이다. 이렇게 볼 때 윤리적 진보의 적어도 하나의 결정적 기준은 윤리 공동체의 확대, 즉 윤리적 객체인 타자의 범위를 확대하는 것이다. 이른바 근대적이고 합리적이며 개화된 윤리의 특징은 가족, 부족, 민족, 인종 등의 벽을 무너뜨리고 모든 인류를 윤리 공동체에 가입시켜 윤리적 객체인 타자에 포함하는 데 있다. 개방적인 점만 보면 근대적 윤리가 전근대적 윤리에 비해서 진보적이다. 벤담이나 칸트에서 그 예를 볼 수 있듯이, 근대적 윤리는 인간의 평등을 근간으로 한다. 이들은 분명히 계급, 인종을 초월하여 모든 인간을 다 같이 윤리적 배려의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페쇄적이 아니라 개방적이다.

  그렇지만 인간 이외의 모든 동물을 윤리적 고려의 대상, 즉 윤리 공동체 밖으로 배제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여전히 배타적이며 인간 중심적이다. 이러한 근대적 윤리는 인간 이외의 어떠한 생명체도 윤리 공동체에 포함시키지 않는 '인간의 유일성'이라는 형이상학적 신념에 근거하고 있다.

  인간 중심주의적 윤리관이 전제하는 이러한 유일성에 의심이 생길 때, '환경 윤리'의 문제 제기가 의미를 지니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환경 윤리'는 인간 중심주의적 윤리관의 기본 전제 자체에 대한 의문·검토·비판에 기초한다. 인간 이외의 모든 생명체들도 윤리 공동체에 참여시켜서 유일한 윤리적 주체인 인간의 윤리적 배려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배려하지 않은 게 아니라 그 시대 전체가 노예를 배제하지 않았나?

마치 개인이 그런 것처럼 느껴지는 문장이야.

-그리고 인간도 자연의 일부인데 마치 자연을 배려해야 한다는 것처럼 말하는 것도 오만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