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 여행/장르소설 여행
십이국기 8 - 오노 후유미
휘란
2012. 2. 15. 23:27
8권은 공국의 이야기로 열두 살짜리 여자애가
왕이 되겠다고 나온다는 설정이 무척 마음에 들어서
거의 단숨에 읽고 말았다.
왕의 자질이란 다른 게 아니라
이런 마음에서부터 시작하는 게 아닐까.. 하는 걸 보여주는 듯한 내용.
그녀는 운이 좋았던 것도 있지만
왕기가 있었기에 여러 모로 운명적으로도 일이 맞아떨어지는 것도 굉장했다.
신의 안배라는 게 이런 걸까.
굉장히 마음에 들어서 8권 내용 자체가 그녀가 왕이 되는 걸로 끝날 거란 건
예상했지만
그 후의 이야기라던가, 좀더 얘기를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문득, 내가 왜 십이국기를 읽다 말았을까 하는 의문.
분명히 책을 읽다가 중도에 그만두고 던져버렸다.
내 인생에 그래본 적은 손에 꼽을 정도인데 대개는 퇴마록이나 왜란종결자 같은 무시무시한 내용일 때였다.
그저 책일 뿐이라도
그 비릿함과 속이 뒤틀리는 듯한 구역질. 공포. 등등의 이유로 읽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하지만 십이국기는 그런 내용이 아닐 뿐더러
뭔가 그때는 거슬리는 게 있었다. 짜증이 나서 그만둔 건 기억이 난다.
왜 그랬을까. 이렇게 재밌는데.(웃음)
하지만, 전반부는 좀 짜증났었는지도. 계속 비슷한 애기가 질리게 나오는구나. 했으니까.
"아가씨, 좋은 걸 가르쳐줄까?"
발을 멈추고 돌아보는 슈쇼우에게 리코우는 대범하게 웃었다.
"거짓말을 할 때에는 말을 적게 하는 편이 진짜 같아."
"거짓말은 많이 늘어 놓는 게 좋을 때도 있다는 얘기야."
""굉~장히 참고가 됐어요."
"견랑진군이라니, 들어본 적이 없어요."
"건방진 소리 하는 게 아냐. 황해에서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니까."
"신이라면 많이 있잖아요?"
"황해는 신에게서 버려진 곳이야. 거기에 일부러 내려와서 여행자들을 보살피는 분은 진군 밖에 없어."
"왜 요마 같은 게 있는 걸까. 내가 천제였다면 없애 버렸을 거예요."
간큐는 쓴웃음을 지었다.
"옥좌 다음에는 천제 자리까지? 너, 정말로 욕심이 많구나."
"필요한 일을 제대로 해주는 사람이 없으니까, 이렇게 어린 내가 일일이 걱정해야 하잖아요."
"왕조의 존속을 위해서, 국토의 안녕을 위해서, 왕은 누군가의 피를 흘리도록 명령한다.
설령 왕 자신이 명하지 않아도 신하가 왕을 위해서 그걸 행하면 유혈의 책임은 왕에게 돌아가지.
어떤 의미로 무혈의 옥좌라는 것은 있을 수 없어."
슈쇼우는 나무 위의 그림자를 바라봤다.
"자신을 위해서 남의 피가 흐른다.―그게 옥좌라는 거야."
"서로 돕는다는 말은 최저한의 일을 할 수 있는 인간들끼리 모여야 의미를 갖는 거 아냐?
아가씨 기분은 잘 알겠지만, 능력 있는 인간이 능력 없는 인간을 일방적으로 돕기만 하는 건 서로 돕는다고 하지 않아. 애물단지를 싸안는다고 하지."
"요약하자면 그건 내가 나중에 곤란해지는 것이 싫으니까 지금 곤란해하는 사람을 내버려 둔다는 말이 되지 않니?"
"그런 얘기가 되지만…. 하지만 눈 앞에 있는 곤란한 사람을 내버려 두는 짓이 심한 일이라면, 눈 앞에 있는 사람이 나중에 곤란해질 걸 뻔히 알면서 무리하게 부탁하는 것도 똑같이 심한 짓이 아닐까요?"
"지금 몇 명의 목숨도 구하지 못하는 사람이, 삼백만 명의 사람을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럼 왕이 되면 단 한 명의 사람도 죽이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해?"
슈쇼우는 입을 다물었다.
"몇 명을 버리고라도 백성 전부를 구할지, 아니면 정에 휩쓸려서 몇 명을 돕고 국토를 망국의 황폐로 만들 건지, …그런 선택은 옥좌에 앉게 되면 수없이 하게 되는 거다, 슈쇼우."
"그건―."
"물론 나로서도 저 사람들을 희생시키는 게 괴롭지 않은 건 아니야. 혹시 나에게 지금 저 사람들을 도울 힘이 있었더라면 금방이라도 돌아가고말고. 하지만 나로서는 그럴 힘이 없어. 이제는 이미 저들의 숭고한 희생에 감사하면서 앞으로 나아가고, 앞으로도 그 사람들에 대한 감사를 잊지 않고서 그만큼 다른 사람들에게 베푸는 것으로 그 사람들의 한을 갚을 수밖에 없는 거야."
"그런 것…."
이래서는 황주와 아무런 차이가 없지 않은가. 결국 누군가가 희생이 되는 사이에 조금이라도 도망친다. ―하지만 그 외의 방법이 사람에게 있는 것일까.
"…난 정말 바보였어."
중얼거리는 소리는 질주하는 마차의 소리에 가려졌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돕는다. 그것은 강한 자의 의무이다. 하지만 이 황해에서 강한 자 따위는 없다. 그것은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도와서 자신과 약자를 지킬 수 있는 세계에서의 이야기일 뿐, 강씨들 역시 황해 안에서 절대로 강자가 아닌 것이다.
"당신이 돌아갈 용기가 없다면 멋대로 하면 돼요. 나도 돌아가라고 안 할 테니까.
자신의 어리석음의 대가도 치를 줄 모르는 겁쟁이는 따라와줄 것 없어요. 그렇다고 나까지 겁쟁이로 만들지는 말아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