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 여행

어느 독서광의 유쾌한 책 읽기 - 김의기 (4부)

휘란 2018. 1. 11. 12:29

2018년 1월 2일~

진행 중.


4부는 테마를 모르겠다. 2부에 이은 미스테리.<-

『안나 카레니나』, 『무기여 잘 있거라』,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보바리 부인』, 『싯다르타』

굳이 고르자면 불륜과 구도일까.


이 중에 읽은 책이 또 한 권 있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리나』도 꽤 장편이다.

그래서 읽을 엄두가 안 나기도 하는데... 줄거리는 만화를 통해 알고 있다.

만화로 알게 되면 줄거리가 너무 간단해서... 이건 좀 아닌데 하는 느낌이 든다.


톨스토이가 안나의 외적, 내적 아름다움을 상세하게 묘사할 수 있었던 건 그가 산문을 썼기 때문이다. 이것이 산문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희곡이나 시는 이렇게 상세한 묘사를 할 수 없다. 시나 희곡은 독자의 시각과 청각을 필요로 하지만, 산문은 시각과 청각 뿐 아니라 인물의 내면까지 묘사할 수 있다. (213쪽)


<안나 카레니나>는 브론스키와 안나, 레빈과 키티라는 두 쌍의 남녀를 통해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214쪽)


톨스토이의 문장은 아주 자연스러워서 독자가 마치 19세기 러시아에서 극중 인물과 함께 살아간다는 느낌을 준다. 톨스토이의 소설은 열어놓은 창문을 통해 자연의 바람이 불어오는 것처럼 현실과 문학이 하나되는 느낌을 준다. (216쪽)


헤밍웨이의 『무기여 잘 있거라』는 1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하는 작품이다.

어쩐지 나는 전쟁을 배경으로 하는 작품은 읽기가 힘들다.

한국 소설도 50년대 전쟁 문학들 읽는 게 힘들었다.


게다가 이 작품은 허무주의를 짙게 표현한 작품이라고 하니... 더욱 읽기 힘들 것 같다.

절망의 문학이라고도 하니 읽을 수가 없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학생 때 읽은 책이다.

읽고 나서 역시 이해할 수 없었다. 

당시의 나는 자살할 힘이 있다면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에 

삶의 절망을 이해하지 못했다.

지금은 그나마 저 말을 꺼내면 자살희망자에게 상처가 된다는 것은 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줄은 몰랐다.

이 작품이 영향을 끼쳐서 죽은 젊은이들도 있다고 해서 좀 안타까웠다.


이런 것들을 보면 세상일은 간계와 사악함보다는 오해와 나태함 때문에 훨씬 복잡해지는 게 아닌가 생각하게 돼. (224쪽)


괴테는 희대의 대작 <파우스트>로 유명하지만, 수많은 시와 소설, 과학 논문을 발표한, 그 시대 모든 분야에서 최고의 인물이었다. 그는 장 자크 루소가 죽은 후 유럽의 지성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229쪽)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은 옛날 책모임 도서이기도 했지만 초반이 너무 지루해서 덮었다.

리얼리즘이라는 게 빠짐없이 묘사하는 거라면 

그건 참 지루한 것이란 인상을 준다. 그 부분을 빠르게 읽고 지나간다면 읽기야 읽겠지만.


남자는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 행동이 뛰어나야 하고, 여자에게 정열의 에너지, 고상한 삶, 모든 신비한 것을 불러일으켜야 한다. 그러나 이 남자는 아는 게 아무것도 없고, 가르쳐 주는 것도 없고, 원하는 것도 없었다. (233쪽)


성차별적인 문장이란 생각이 든다.

이런 비슷한 문장은 또 나온다.


그녀가 여자임을 증명하는 것은 그녀의 스커트 말고는 없었다. (235쪽)


네 마누라에게 필요한 건 일이야. 힘든 노동을 해야 해. 그녀가 살기 위해 일해야 한다면, 저런 거품은 일으키지 않을 거야. 일을 하지 않으니까 머리가 난센스로 가득 차고 게으름뱅이가 되는 거야. (236쪽)


그리고 이 작품을 읽은 작가 역시 엠마를 비난한다.


이 모든 과정에서 샤를은 헌신적으로 그녀를 돕고, 그녀가 하고자 하는 모든 것을 이해하고 허락한다. 어떤 남자가 이렇게 하겠는가? 그런데도 엠마는 이걸 모른다. (239쪽)


작품을 읽진 않았지만 결혼 생활은 엠마 혼자 하는 게 아니니까 엠마 잘못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그런데 불륜이 생기면 무조건 여자 잘못이다. 참 이상한 사고다.


플로베르는 '엠마는 바로 나 자신'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래, 엠마는 나다. 그녀는 우리다. 하지만 그녀는 보통사람이기를 거부하고 자신도 특별한 사람이 하는 사랑을 할 수 있다고 믿었다. (240쪽)


헤세의 『싯다르타』는 '보바리 부인'과 함께 책장 어딘가에 처박혀 있다.

읽지 않았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걸 보고 읽고 싶어졌다.


물론 의견이란 건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름다울 수도 있고, 더러울 수도, 영리하거나 어리석을 수도 있고, 누구든 그것을 받아들일 수도,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경고합니다. 당신이 들은 가르침은 내 의견이 아닙니다. 그것은 지식에 목말하 하는 사람들에게 세상을 설명하기 위해 한 말이 아닙니다. 그 가르침의 목적은 고통으로부터 해탈하는 것입니다. (243쪽)


모든 슬픔도 시간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모든 자학과 공포도 시간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세상의 모든 곤란과 죄악도 시간을 정복하자마자, 시간을 추방하자마자 정복되는 것이 아닐까? (245쪽)


나도 물론 생각을 많이 했고 깨달은 지혜가 있어. 그런데 그 지혜는 말로 전달할 수 없을 것 같아. 말로 전달하고 나면 바보 같은 소리처럼 들려. (247쪽)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될 수 있다'고 하는 개념이었다. 싯다르타가 깨달은 것은 죄인이 언젠가 부처가 될 것이라는 게 아니다. 죄인이 부처가 될 가능성은 이미 죄인에게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미래는 이미 와 있는 것이다. 부처가 우리 안에 숨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부처는 도둑 안에 있다.

따라서 무엇이든 존재하는 것은 좋은 것이다. 죽음과 삶, 죄와 거룩함, 지혜와 어리석음, 모든 것이 필요하고, 이 모든 것이 좋은 것임을 인정하기면 하면 된다. 죄를 짓는 일도 필요하고, 욕망을 달성하는 일도 필요하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돈도 벌어봐야 하고 절망감도 느껴봐야 한다. 병도 걸려봐야 한다. (24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