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 여행

보다 - 김영하 (2)

휘란 2017. 8. 9. 23:55

부를 읽었다.

한 부씩 읽으면서 정리할까 생각 중.


너무 재밌어서 아껴먹는달까.


영화나 소설에서 빈번히 일어나는 로맨틱한 사건들이 곳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피렌체행 기차로 갈아타기 위해 비엔나역에 내리기 전까지 근 보름 동안 나는 낭만적 사랑은커녕 말 같은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한 상태로 유럽의 도시들을 헤매다니다 거의 우울증 직전의 상태에 처해 있었다. (63쪽)


이십대는 몸으로, 사십대는 머리로 산다. 살아보니 둘 다 나름대로 좋았다. 

(69쪽)


다른 영화나 작품은 몰랐지만 69쪽에 나오는 영화 '건축학 개론'은 내가 본 영화라 확실히 더 재밌게 읽었다.

아직 안 본 것들도 보고 다시 읽으면 재밌을 것 같다고 기대하며.

영화를 표상적으로만 생각한 나는 작가의 해석이 무척이나 흥미로웠다.


부모와 자식 간의 분리가 일찍, 분명하게 이뤄지는 서구 백인들의 문화에서 부부 사이에는 설령 자식이라 하더라도 함부로 끼어들지 못한다. 반면 <건축학개론>에서 보듯 우리의 남녀관계는 훨씬 신경증적이다. 부모와 자식 간의 분리는 여간해서는 이뤄지지 않으며 거의 모든 애정관계가 부모(특히 이성 부모)와의 관계를 삼각형의 한 축으로 하여 형성된다. (74쪽)


자신이 뭘 욕망하는지를 모르(는 척 하)면서 오직 타인을 통해 그것을 알아내고자 하는 서연 같은 여자, 참 피곤하다. 그런데 남자들은 늘 그런 여자들에게 매력을 느낀다. 남자 역시 여자의 욕망을 통해 자신의 욕망을 발견하기를 원하기 때문일 터. (75쪽)


영화 속 서연이라는 캐릭터가 잘 이해가 안 갔다.

뭐 저런 여자가 다 있지?-_-?

감독이 하고 싶은 말이 뭔지도 몰랐다.

그런데 이 부분을 읽고 이해했다.


우리의 내면은 자기 안에 자기, 그 안에 또 자기가 들어 있는 러시아 인형이 아니다. 우리의 내면은 언제 틈입해 들어왔는지 모를 타자의 욕망들로 어지럽다. 그래서 늘 흥미롭다. 인간이라는 이 작은 지옥은. (75쪽)


아이를 사랑하지 않은 부모는 아이의 애정을 받지 못하고 어려서 불행하게 자란 사람일수록 연인과의 관계가 더 원만하다면 얼마나 바람직할까. 그런데 불행히도 인간사는 정의에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다. (78쪽)


우리들 모두는 한때 부모의 사랑과 보살핌이 절실한 나약한 어린아이였다. 그 사실이 변한 적은 없다. (중략) 비록 우리가 나약한 어린아이로부터 비롯되었다 해도, 부모가 우리가 부과한 그 굴레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닐 것이라는 희망을 나는 거기에서 보았다. (83쪽)


2013년 4월, 북한의 무시무시한 협박이 계속 이어지는 가운데 우리가 평온하게 살아가는 것에 대해 세계가 놀라워했다. 후쿠시마의 방사능이 무서워 일본 여행을 못하겠다는 한국 대학생에게 일본인이 김정은의 핵은 안 무섭냐고 의아해했다는 얘기도 들었다. (중략) 남의 위험은 더 커 보인다. 반면 자기가 처한 위험은 무시한다. 그게 인간이다. (90쪽)


죽음과 종말을 떠올리면 현재의 삶은 더 진하고 달콤해진다. (중략) 

미래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미래의 시점에서 현재의 파국을 상상해보는 것은 지금의 삶을 더 각별하게 만든다. 그게 바로 카르페 디엠이다. (90쪽)


"죽음은 우리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생각에 익숙해져라. 왜냐하면 모든 선과 악은 지각에 근거하는데, 죽음은 이러한 지각의 상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죽음은 우리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점을 올바르게 통찰하면, 우리의 유한한 삶은 즐거울 수 있다. 왜냐하면 이 통찰이 우리 삶에 무제한적인 지속성을 부여하기 때문이 아니라 영원히 살고자 하는 욕구를 없애기 때문이다. (…) 가장 끔찍한 악인 죽음은 우리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존재하는 한 죽음은 오지 않고, 죽음이 오자마자 우리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폴커 슈피어링, 『철학 옴니버스』자음과 모음, 2013) (92~93쪽)


죽음은 개별적이다. 탄생은 어미의 고통과 함께하지만 죽음은 홀로 겪는다. 요컨대, 우리는 모두 혼자 죽는다. (93쪽)


"삶이 이어지지 않을 죽음 후에는 전혀 무서워할 것이 없다는 사실을 진정으로 이해한 사람에게는 삶 또한 무서워할 것이 하나도 없다." 

(알랭 드 보통, 『철학의 위안』, 청미래, 2012) (9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