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 여행

소설가의 일 - 김연수 (3)

휘란 2016. 1. 24. 22:52

3부 시작하는 부분에서 작가는 평생에 걸쳐서 책장에 소설 365권, 비소설 365권을 놓고 노후대책이 그 730권이라고 언급한다.

그 부분을 보고 이미 2천여권(이제 세어놓기도 귀찮다...;;;)의 책들을 정리 못해서 허덕이는 나는

겨우? 

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천 권도 안 되는 책으로 무슨 노후를 보낼 수 있을지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었다.


하루종일 책을 읽으면 한두 권은 거뜬히 읽을 수 있다.

1년이면 365권을 다 읽을 것이고 730권이라면 2년 내에 다 읽어버리는 그런 상태.

만약 암 같은 병에 걸려서 남은 수명이 2년 정도라면 작가의 방법을 고려해보겠지만 말이다.



"흔한 일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건 너무나 특별한 일이었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래서 일상의 시간이 감사의 시간으로 느껴진다면, 그래서 그 일들을 문장으로 적기 시작한다면 그게 바로 소설의 미문이자, 사랑에 빠진 사람의 문장이 된다. 

  흔한 인생을 살아가더라도 흔치 않은 사람이 되자. 미문을 쓰겠다면 먼저 미문의 인생을 살자. 이 말은 평범한 일상에 늘 감사하는 사람이 되자는 말이기도 하다. 그게 바로 미문의 인생이다. 소설 속의 인생 역시 마찬가지다. 추잡한 문장은 주인공을,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자기 인생을 뻔한 것으로 묘사할 때 나온다. 사랑하지 않으면 뻔해지고, 뻔해지면 추잡해진다. (174쪽)


  그렇다면 소설가란 정확한 단어를 사용하는 사람이리라. 화가가 울트라마린과 인디고를 구분할 수 있다면, 소설가는 '휘청거리다'와 '지벅거린다'를 구분할 수 있어야만 한다. (176쪽)



어휘 얘기가 나오면서 사전 사는 게 돈 아깝지 않다는 작가.

나는 사전 사는 게 돈 아깝다는 쪽이라 이 의견이 꽤 신선한 충격이었다.

평생 읽어도 다 읽지 못한다면 안 사는 게 낫지 않을까.



  사전 편집자라는 단어가 사라진 세상은 그 이전보다 가능성이 사라진 세상, 덜 다양한 세상, 문장으로 보자면 쓸 수 있는 단어가 하나 줄어들었다는 점에서 소설가나 사전 편집자에게는 더 안 좋아진 세상이다. (179쪽)


  모두 죽는다고 생각하면, 이렇게 사나 저렇게 사나 좋은 게 좋은 것이고 모든 게 축제이긴 한데, 역시 현실은 담배를 많이 피우면 폐암이라는 잔인한 진실. 하지만 전격대담을 잘 읽어보면 그 잔인한 진실과 모든 게 축제인 삶이 서로 무관하지 않다는 게 이노우에 히사시의 말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잔인한 진실이 있기 때문에 모든 건 축제가 됐다는 뜻이니까. (182쪽)


소설을 계속 쓰면 쓸수록 행동하는 것, 말하는 것, 쓰는 것 등,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들 그 자체가 중요하지, 내용 따위는 없어도 상관없다는 걸 점점 깨닫게 된다. 그건 이런 이야기다. 책이란 가장 단순하게 봤을 때, 빈 페이지에 글자를 인쇄한 것이다. 그 글자를 어떤 식으로 배열할지는 소설가가 지정한다. 독자는 소설가가 지정한 순서대로 글자를 읽는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소설가가 소설을 쓴다는 것, 그리고 독자가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이게 전부다. (188~189쪽)


  문제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고, 생각을 생각하니까 이런 문제가 생긴다. 생각을 생각한다는 건 같은 원인으로 같은 결론을 도출한다는 뜻이다. (195~196쪽)


그러니 소설을 쓰겠다면 생각하지 말자. 쓰고 나서 생각하자. (199쪽)


  요즘 안다는 건 무엇이고 모른다는 건 또 무엇인지 혼자 곰곰이 생각할 때가 많다. 안다는 건 경험에서 나오니 사실 아는 건 과거에 안 것이다. 과거에 알았다고 해서 지금도 아는 건 아니다. 지금은 '모른다'에서 '안다'로 가는 어떤 과정 속에 있을 뿐이다. 그걸 가장 잘 표현하는 동사는 아마도 '산다生'가 아닐까? 산다는 건 경험을 통해 몰랐다가 알게 되는 과정을 뜻한다. 그런 식으로 보자면, 미래에 어울리는 동사는 '모른다'뿐이다. 정리하자면, '과거-안다, 현재-산다, 미래-모른다'의 공식이다. (202쪽)


소설가의 첫번째 일은 초고를 쓰는 일이다. 그 초고를 앞에 두고 이렇게 묻는다. 내가 모르는 것은 무엇인가? 내 가 쓸 수 없는 건 무엇일까? 그렇게 해서 일단 모르는 것, 쓸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게 소설가의 두번째 일이고, 모르는 것을 알고 쓸 수 없는 것을 쓰는 게 세번째 일이다. (204쪽)


  한국인들이 말하는 정치는 이 공포에 기반한다. 한국의 정치가 타협할 수 없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공포를 대면하면 그저 죽이거나 도망치거나 둘 중 하나지, 타협이란 있을 수 없으니까. 그럼에도 우리는 이 공포를 결코 이길 수 없다. 왜냐하면 공포는 우리를 노예로 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니까. 정치의 영역뿐만 아니라 사회의 다른 영역에서도 우리는 공포의 노예일 뿐이다. 예를 들어 다른 집 애들에게 자기 아이가 영영 뒤처질 것이라는 공포가 없다면 어떤 부모가 세 살배기를 영어학원에 보내겠는가? (208쪽)


  삼십 초 안에 소설을 잘 쓰는 법을 가르쳐드리죠. 봄에 대해서 쓰고 싶다면, 이번 봄에 어떤 생각을 했는지 쓰지 말고, 무엇을 보고 듣고 맛보고 느꼈는지를 쓰세요. 사랑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쓰지 마시고, 연인과 함께 걸었던 길, 먹었던 음식, 봤던 영화에 대해서 아주 세세하게 쓰세요. 다시 한번 더 걷고, 먹고, 보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은 언어로는 직접 전달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하세요. 우리가 언어로 전달할 수 있는 건 오직 감각적인 것들 뿐이에요. 이 사실이 이해된다면, 앞으로 봄이 되면 무조건 시간을 내어 좋아하는 사람과 특정한 꽃을 보러 다니고, 잊지 못할 음식을 먹고, 그날의 날씨와 눈에 띈 일들을 일기장에 적어놓으세요. 우리 인생은 그런 것들로 구성돼 있습니다. 그렇다면 소설도 마찬가지예요. 이상 강의 끝. (217~218쪽)


그럼 소설가는 어떻게 허기진 상태를 유지하는가? 여기 눈앞에 몇 달 전에 따른 물로 가득 찬 컵이 있다고 치자. 이미 썩었는지 부유물 같은 것으로 물속이 흐릿하다. 마실 수 있겠는가? 자신도 못 마실 물이라면 남에게도 권하지 말자. (중략) 혁신하는 거 하나도 어렵지 않다. 비우면 혁신이다. 이제 컵은 비었으니 신선한 물을 채우면 된다. (220~221쪽)


 아는 사람은 쓰지 못하고, 쓰는 사람은 알려고 하지 않는다. 느끼려고 할 뿐. 더 많이 느끼고 싶다면, 늘 허기지게, 늘 바보처럼 굴어야 한다. 미식가보다는 지금 자기 앞에 놓인 이 평범한 일상을 강렬하게 맛볼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만 한다. (224쪽)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