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주의 감정수업 - 강신주 (2)
2014년 12월 9일~13일.
책모임 선정 도서.
오라버니 소장.(내 책 아님)
누구나 아는 바와 같이 아내라는 존재는 청혼에 응하는 그 운명적인 순간부터 여자라는 종에서 벗어나 별도의 잡종이 된다. (49쪽)
-에릭 오르세나의 '오래오래'에 나오는 표현인데 이 표현이 기분 나쁘면서도 한편으로는 일리있게 여겨졌다.
카뮈의 철학 "모든 것이 부조리하다는 것을 인식하는 인간"에 의하면, 인간은 인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맹목적인 삶에 묶여 있다는 걸 인식할 때 삶의 부조리함을 깨닫지만, 그 해결책을 찾지 못한다는 자각으로 인해 '구역질'을 느끼고 그 불합리함에 대항하여 희망 없는 반항을 하게 된다.(145쪽)
-카뮈의 철학은 잘 모르지만 그의 작품은 몇 편 읽었다.
그리고 나는 프랑스 작품들의 난해함과 어려움에 대해 잘 알고 있다.
구역질이라는 표현에서 사르트르의 '구토'를 떠올렸다. 이 작품은 읽다 말았지만, 사르트르가 실존주의자라는 건 알고 있다.
그와 관련된 이야기일까?
"하지만 인간은 패배하도록 창조된 게 아니야." 그가 말했다.
"인간은 파멸당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패배할 수는 없어."(265쪽)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에 나오는 표현 같다. 어떤 의미의 패배인지는 몰라도 역시 잘 이해가 안 간다. 이해하려면 이 책을 읽어봐야겠지.
그리고 파멸당하는 것과 패배하는 것의 차이는 뭘까?
우리는 어떤 의미로 창조된 것일까?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존재할까? 물론 존재한다. 그렇지만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사랑의 종류 중 하나가 아니다. 이루어질 수 있는 사랑이 있고, 반대로 그럴 수 없는 사랑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오히려 사랑을 이룰 수 없는 우리 자신이 문제일 것이다. 그러니까 사랑을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때, 그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된다. 사랑이 어떻게 쉬운 감정이겠는가. 하나를 잡으면 다른 하나를 놓아야 하는 법인데!
한 남자와 함께 있으려면, 가족들과 친구들을 놓아야만 한다. 심지어 목숨마저 요구하는 사랑도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약한 사람에게 사랑은 삶을 뿌리째 뽑아 버릴 수도 있는 폭풍우로 느껴지기도 한다. 약하디 약한 존재가 바로 인간 아니겠는가. 두려워하는 것이 많아 이것저것 따지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다. 고뇌와 고민은 항상 약자의 몫이다.
그렇지만 사랑 앞에서 복잡해져만 가는 생각 끝에 우리가 선택하는 것은 사랑이 가져다주는 불확실성이 아니라 익숙한 일상이기 쉽다.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사랑 앞에서 고뇌하는 것 자체가 이미 사랑에 몸을 던지기에는 우리가 너무 약하다는 증거니까 말이다. 그렇지만 사랑에 빠졌다는 것을, 그리고 지금까지 행복했다는 것을 어떻게 부정할 수 있는가. 불행히도 더 이상 사랑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가 될 뿐.
이럴 때 우리는 상대방에게 감사의 마음을 가지게 된다. "저처럼 나약하고 모자란 사람을 사랑해 주어서 고맙다."라고. "지금까지 너무나 행복했었다."라고. 그래서 상대방에게 해 줄 수 있는 걸 가급적 다 해 주려고 한다. 하룻밤의 섹스를 원한다면 기꺼이 그와 잠자리를 함께할 수도 있다. 혹은 그가 평상시 원했던 근사한 자동차를 사 줄 수도 있다. 지금까지의 행복에 대한 선물이자, 자신의 나약함에 대한 대가인 셈이다. (278쪽 전문)
-사랑에 대한 이야기 같지만 이 부분의 감정은 '감사'이다.
이런 해석이 가능하다는 게 재미있었다. 실은 여러 작품에서 본 사랑의 형태가 이해가 되지 않을 때도 있었는데 이걸 읽고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이 부분은 두고두고 읽고 싶어졌다. 그래서 전문을 땄다.
(단락은 내가 임의로 나눈 것이다.)
다수의 약자를 통제하려면, 소수의 강자가 명심해야 할 철칙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약자에게 해악을 가할 때 같은 약자가 보는 앞에서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자신도 언제든지 해악을 입을 수 있다는 판단, 그리고 자기처럼 해악을 당할 수 있는 사람들이 다수라는 자각은 극심한 분노와 아울러 조직적인 저항을 낳을 수 있으니까.
그래서일까, 권위적인 조직에서는 학생들이나 노동자들의 연대 의식과 유대감을 극히 꺼린다. 반대로 우리가 학생회 아니면 노동조합을 만들어야만 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298쪽)
-분노라는 감정에서 강신주 씨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을 가져왔지만
이 부분을 보고 나는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를 떠올렸다. 영화도 있고 소설도 있지만 제목만 안다는 게 부끄럽지만... 저 부분에서는 그 작품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부르주아 결혼제도의 맹점이라고나 할까. 사적 소유권에 토대를 두고 있는 부르주아 결혼제도는 영혼의 교감보다는 육체의 교감에 더 신경을 쓰니까. 소유의 문제는, 아파트나 땅을 소유하듯이 그렇게 모두 시각적인 대상에만 국한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무언가 눈에 보여야만 문제를 삼을 수 있다.(302쪽)
-부르주아...의 뜻이 여기서는 어떤 의미로 쓰인 걸까?
어쩐지 자본주의를 가리키는 것 같기도 한데, 사전에는 중산 계급, 자본가 계급, 부자 등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나와 있다. 어쨌든 현 결혼제도도 별반 다를 게 없다.
증거가 없으면 법적 처벌은 할 수 없으니까.
게다가 일기 같은 쓰잘머리 없는 것은 절대 쓰지 않는다. 쓸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 주인처럼 겉과 속이 다른 인간은 일기라도 써서 세상에 드러내 보일 수 없는 자신의 속내를 풀어 놓아야겠지만, (후략) (321쪽)
-나쓰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의 일부이다.
이걸 보고 내가 왜 이 작품을 한두 장인가 읽다 말았는지 조금 알 것 같았다.
어쨌든 나는 일기를 쓰는 '인간'이니까, 저 표현이 좀 아팠다.^^;
알지 못하는 것에는 허투루 대할 수 없는 무언가가 숨어 있다 여기고, 가늠할 수 없는 것은 왠지 대단하다 싶은 마음이 들기 마련이다. 그 때문에 보통 사람들은 모르는 것을 아는 것처럼 떠벌리지만 학자들은 아는 것도 모르는 것처럼 해석하는 것이다. 이 점은 대학 강의에서 무슨 소린지 모를 얘기를 하는 선생은 평판이 좋고, 아는 얘기를 또 설명하는 선생은 인기가 없는 것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다.(327쪽)
-역시 같은 작품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의 일부.
우리 인간의 속성이 이런 것이다. 이 책을 천천히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계기가 된 구절.
지금 내게 있는 어떤 소중한 것에 대하여 그것이 곁에 머물러 있으면 행복한 것이지만 그것이 떠나 버린다 할지라도, 그것을 상실로 받아들이지 말고 원래 상태로 돌아간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할 것!
그러면 안개가 걷히듯 어느 사이엔가 두려움이라는 감정은 여러분 곁은 떠나게 될 것이다.(356쪽)
-지금 나를 지배하는 감정은 이 '두려움'이 아닐까?